D+96 체르마트와 마테호른 330km
오늘은 마테호른이다. 체르마트까지 거리가 170km정도, 2시간 반 소요된다니 서둘면 빨리 돌아올 수 있겠다 싶다. 그런데 아침에 밥을 하는데 젊은 친구들이 우리 텐트 옆에다 주섬주섬 밥상을 차린다. 오늘 아침을 같이 먹자는 말도 하지 않고 해서 옆 텐트 할배를 생각해 밥을 3인분만 했는데 밥이 많이 모자라게 생겼다. 게다가 녀석들이 우리 밥을 빼앗아 먹어서 미안하다고 말한다. 그건 빼앗아 먹는 게 아니고 그냥 얻어먹거나 나눠먹는 것인데, 말을 이렇게밖에 할 줄 모르나 싶어서 매우 불쾌하다. 그렇다고 아침부터 가르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참 답답하고 한심하다. 그래서 출발은 10시가 넘는다.
오늘 귀국하는 울산팀이 가면서 남은 물건 여러가지를 주고간다. 비행기 담요와 베개, 휴지와 키친타월, 커피 등등 양이 많아 당분간 잘 쓰겠다. 우리는 아직 여행이 많이 남아, 주고 갈 게 없네. 어제 세계일주 젊은 부부에게는 우리가 쓰지 않는 이소부탄 가스통 2개를 줬다.
여기서 국경까지는 10여km, 조그만 고개를 하나 넘으면 바로 국경인데 세관 같은 게 있긴 하지만 깃발이 없으면 그게 세관인지 뭔지 전혀 알 수가 없을 정도다. 스위스로 들어가니 바로 국경마을이 나오는데 기름값은 프랑스보다 그리 비싸지 않는 1.5유로. 고개를 넘어야 하는데 길거리에 살구 매장이 많다. 이 동네 특산품이 살구인가 보다. 내가 살구를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 그냥 통과. 1572 Forclaz 고개에는 왜놈 관광객들이 잔뜩 몰려왔네. 핸들을 넘기고 한잠 잘 잔다.
고개를 내려가니 Martigny 동네가 거의 도시다. 이 도시를 지나면 마을들은 전부 높은 산 위에 진을 치고 있어서 스위스 특유의 예쁜 마을을 찾아볼 수가 없다. 친구는 이런 마을 형태를 매우 신통해 하면서, 알프스 소녀 하이디가 나오는 스위스 산골마을 아니어서 꿈이 깨졌다고 실망한다. 그게 정상이겠지? 나처럼 뭘봐도 무덤덤한 사람은 그저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는데. 여기도 마을마다 성이 하나씩 있구나. 스위스 비넷을 피하려고 고속도로를 가지 않고 일반 도로로 다니니 시간은 좀더 걸리지만 마을들을 구경할 수 있어서 좋기도 하다.
체르마트 입구의 Visp에는 터널이 있어서 도시의 번잡함을 피하게 한다. 태슈까지는 오르막이라 한참을 올라가야 한다. 비스프에서 태슈까지 우윳빛 개울을 따라가는 철로도 있어 자동차 운전이 지겨운 사람에게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가는 길에 마테호른 비슷한 산이 계속 보여 저게 그 산이다 하고 혼자 사진찍고 난리를 쳤는데 그게 아니군.
태슈에 도착하니 주차장이 체르마트 셔틀열차와 바로 연결된다. 좋네. 열차시간을 기다리며 잠시 태슈 동네를 돌아보니 여기는 한산하다. 동네 사람들이 좀 억울하겠다. 셔틀열차는 12분 걸린다지만 중간에서 교행하느라 시간이 더 많이 걸린다. 철로 옆으로는 트레일이 있어 시간만 충분하면 걸어서 내려올 수도 있겠다 싶다. 그 트레일로 자전거도 사람들도 잘도 오르내린다.
체르마트 역 광장에는 호텔 셔틀들이 줄지어 손님을 기다리고, 시내는 수많은 호텔과 식당, 기념품점, 각종 상점, 그리고 관광객들로 분주하다. i에 들어가 마테호른이 거울처럼 비치는 호수를 물어보고 열차표를 산다. 114유로지만 3시 30분 이후의 열차는 할인해서 68유로인데 중간역 아무 곳에서나 타고내릴 수 있다네. 호수이름은 Riffelsee.
시간이 많이 남아 우선 점심부터 해결한다. 마테호른이 눈 앞에서 반짝이는 역앞 공원에서 컵라면. 역 바로 앞 상가건물에 있는 COOP에 들러 물가조사도 해보는데 다른 나라 가격을 잘 기억하지 못 해 비교가 잘 되지는 않는다. 다른 건 잘 모르겠고, 맥주는 프랑스보다 좀 비싼 편이다.
3시 40분 기차를 타고 호수를 보러 올라간다. 스위스 고산지대 초원 풍경이 그런대로 예쁜데 기차 색깔이 그리 예쁘지 않아 좀 실망이다. 기차를 타고 올라가면서 보니 체르마트 동네가 매우 크네. 집들이 빼곡이 들어섰는데 이 많은 사람들이 다 뭘 먹고 사는지 궁금해진다.
약 40분 후 역 4개를 지나 호수가 있는 2815m Rotenboden역에 하차한다. 올라오면서 보니 걸어서 내려가는 사람들이 많아 우리도 내려갈 때는 걸어갈 욕심이 생긴다. 5분 거리의 리펠 호수로 내려가니 마테호른이 비춰지기는 하는데 바람이 불어 수면이 잔잔하지 않으니 반영은 엉망이다. 아깝다. 하필이면 내가 올라온 이때 바람이 반영을 방해하다니. 한참을 기다려도 수면이 잔잔해지질 않아 약간의 흐릿한 반영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구름이 수시로 산을 가려서 제대로 된 마테호른의 전모를 볼 수도 없게 한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다음을 기약하며 하산키로 한다.
기차시간에 맞춰 역으로 올라왔는데 친구가 눈을 밟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며 마지막 역 3089m의 Gornergrat까지 올라가자네. 거기 가면 시간이 늦어 걸어서 내려갈 수는 없다. 내려가는 기차도 5시 18분 이후에는 1시간이 지나야 다시 탈 수 있으니 어차피 스위스 트레일을 걸어보기는 어렵게 생겼다.
빙하는 좀더 많이, 잘 보이지만 눈을 밟을 수는 없는 고르너그라트 역에서 한참을 논다. 여기 꼭대기에도 호텔이 있다. 인공빙하호가 하나 있어 옥빛 물색깔이 예쁘다.
기차를 타고 체르마트로 내려오니 6시. 기차를 타기 전에 마그넷을 하나 산다. 굳이 살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마테호른은 내가 꼭 보고 싶어하던 곳이었으니 9프랑이 그리 비싼 건 아니라는 생각이다. 6시 15분 셔틀열차를 타고 태슈에는 6시 20분에 도착한다. 6시간 주차료가 10.5스위스프랑, 그리 비싸지 않다. 돌아오면서 갈 때 찍지 못 했던 마흐트니 동네 사진 포인트를 찾는다.
다시 고속도로를 피해 국도로 열심히 달려 캠핑장에는 9시 30분에 도착해서 라면으로 저녁을 때운다. 점심도 라면, 저녁도 라면이네. 고기구경한 지가 한참되었다. 국경의 프랑스 정보가 적힌 안내판에서 프랑스 고속도로는 제한속도가 130이라 적혀 있다.
몽블랑을 보고 마테호른을 본 친구는 스위스 환상이 깨졌다며 아쉬워한다. 마을은 전부 산꼭대기에 있고 마테호른의 풍광이 몽블랑보다 못 하다며 시원섭섭해 하는군. 6시간 만에 스위스 한귀퉁이만 보고 전체를 판단할 수는 없지만 이렇게 스위스의 환상이 깨지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