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97 락블랑(Lac Blanc)
오늘 아침은 밥을 해서 따뜻한 밥에 카레를 비벼본다. 먹기가 훨씬 낫다. 도보꾼은 일행인 늙은 할배를 버리고 체르마트로 걸어간다고 아침에 출발한다. 기념사진을 한장.
듣기는 했지만 정확하게 듣지 않아 이름이 많이 헷갈리는 Lac Blanc을 열심히 찾아 위치와 가는 길을 확인하고 옆 텐트 말라깽이 할배와 함께 길을 떠난다. 버스터미널에서 30분 배차간격의 01번 버스를 타고 12분 거리의 La Plaz, Flegere에서 내리니 케이블카 탑승장이 금방인데 땡볕에 줄이 무지 길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몰리는데 표사는 줄에 그늘막 하나 없다. 땡볕에서 기다려 표를 사고 곤돌라에 타기까지 거의 45분이 걸린다. 1894m의 La Flagere 곤돌라 탑승장에 내리니 거의 1시간이나 걸리네.
아래는 뜨거운데 천m 가까이 고도를 올렸다고 바람은 시원해서 좋다. 먼저 올라간 할배를 기다려 만나서 그늘 의자에서 빵과 우유 등으로 점심을 처리한다. 빵은 참 맛이 없는데 바나나가 맛있다. 건너 편 몽블랑 산군의 경치가 매혹적이고 멀리 보이는 몽블랑의 눈덮인 정상이 참 예쁘다. 오를 수 없어서 더 예쁘고 아깝다.
락블랑 가는 길이 산허리를 삼아돌면서 아스라한데 오르는 사람들이 많이 보이네. 2시간 30분이면 돌아온다는 안내서로 보아, 가는 데는 1시간 반이면 충분할 거라고 믿고 길을 떠난다. 조금만 오르면 길이 평탄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웬걸, 오르막이 끝없이 이어지며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줘서 오르기가 한결 나으니 발걸음도 가볍다. 지금 야생화들이 한창 개화하는 시기라 온 천지에 야생화가 눈부시다.
평평한 산책로 같은 길은 하나도 없이 오르막만 약 2시간 정도 오르니 드디어 호수가 나타난다. 호수는 아래 작은 놈 하나와 위에 조금 큰 놈 하나가 서로 연결된 모습인데 옥빛 색깔은 방향이 달라 당연히 보이지 않는다.
바람이 많이 부니 역시 반영은 시원찮은데, 여기는 반영을 보는 곳이 아니니 그다지 아쉽지 않다. 넓은 고산지대 초원이 펼쳐지는 곳이라고 잘못 들었나? 초원은 그리 넓지 않고 텐트만 몇 개 보인다. 이런 곳에서 캠핑하면 정말 좋다고 아침에 떠난 도보꾼이 자랑했지만 나와는 동떨어진 별세상이니 부러워하기만 한다. 무거운 박배낭을 짊어지고 여기까지 올라오는 건 내 영역이 아니다. 호숫물에 발을 담궈보니 예상보다 차지 않아 견딜 만 하고, 호수 옆에 조그맣게 붙어 있는 눈밭에서 잠시 놀기도 해본다.
30여분 잘 보고 하산을 시작하는데 저멀리 캠핑장 방향에 먹구름이 몰려 있고 천둥소리가 난다. 전기요를 좀 말리려고 텐트 위에 걸쳐 놓았는데 비에 젖으면 골치아프다 싶어 하산 발걸음이 매우 바쁘다.
곤돌라에서 내려 다시 01번 버스를 타고 캠핑장으로 바삐 온다. 구름은 이미 다른 방향으로 멀리 가버리고 해는 나지만 전기요는 일단 걷어두기로 하는데, 바람이 많이 불었는지 바닥에 떨어져 있네. 오늘은 시내에서 풍물시장 비슷한 게 열려 보러가자더니 철인3종하면서 유럽을 걸어서 헤집고 다니는 사람을 길에서 만나 물어보니 오전에 끝났단다. 잘 됐다.
할배가 가져온 맥주를 찬물에 조금 두니 시원해진다. 맥주 한잔 하고 좀 쉬었다 밥을 해서 할배와 같이 보드카로 저녁을 먹는다. 흘러간 이야기만 줄창하는 할배가 앞으로 우리가 있을 동안 밥을 같이 먹자고 해서 매우 번거롭게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