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126 알혼섬 - 이르쿠츠크 320km
8시 반에 식당에 가니 아침이 준비되어 있는데 우리가 기대한 블린이 아니고 우유죽 같은 거다. 어제 아침 다른 팀에서 먹던 그 전병 블린을 보고 오늘 아침식사를 예약했는데 실망이다. 그 밀가루 전병은 나중에 집에 가서 해먹든지, 아니면 가는 중에 어디 숙소에서 해먹든지 해봐야겠다. 마눌님은 느끼해서 먹지도 못 하는 우유죽에 생선튀김과 전병 비슷한 음식으로 아침을 겨우 때운다. 나중에 보니 어제 그 팀과 똑같은 식단이네. 이틀 같은 음식을 줄 수 없으니 식단을 바꾼 것인데 우리는 그걸 모르잖아. 아깝다.
9시 40분 숙소를 나와 다시 부르한 곶에 올라서 샤먼바위 등을 보며 알혼섬의 마지막을 새긴다. 하늘마저 맑게 개어 경치가 정말 좋다. 아쉬움을 남기지 말라고 알혼섬이 선물이라도 하는 것 같다. 그런데 바위 위에서 사진찍다가 마눌님이 폰을 떨어뜨려 액정이 깨졌네. 이번에 가져와서 잘 쓴 셀카봉 때문이기도 한데 뭐, 이런 것도 알혼섬의 선물이라 치자.
항구로 가면서는 옆에 우아즈들이 만든 길로 가본다. 길이 매우 편해서 올 때 이 길을 무서워한 게 좀 억울하다. 그래도 40km 오는 데 거의 2시간이 걸린다. 편한 길이라 해도 역시 비포장 울퉁불퉁 길이고, 화창한 하늘이 만들어준 기막힌 풍광을 즐기느라 시간이 하염없이 흘러도 모른 탓이다. 짙푸른 호숫물과 누런 들판, 그리고 파란 하늘이 만들어내는 경치에는 할말을 잊는다. 나중에 보면 똑같은 경치일 테지만 열심히 사진을 찍어둔다. 남는 건 사진밖에 없다는 건 만고의 진리다.
항구에 도착해서 다시 공짜 페리를 타고약 15분 정도 항해 후 육지로 나온다. 주는 것도 없는데 민물에서 사는 갈매기들이 배를 따라오며 알혼섬을 배웅한다. 안녕, 알혼섬. 언제 또 올까? 길이 힘들어서 아마 다시 오지는 않을 것.
미련이 없으니 바로 잘 닦인 도로를 타고 시원하게 달린다. 점심 먹을 곳이 마땅찮아 길가에서 불을 피워 라면. 아침에 너무 느끼한 음식을 먹어 더부룩한 뱃속에는 라면국물이 최고의 약이기도 하다. 한참을 달리니 올 때 블린을 맛있게 먹었던 그 카페 동네가 나오는데, 오늘은 그 아줌마 가게가 문을 닫았네. 대신 그때 문열지 않았던 다른 가게들이 문을 많이 열어 성시를 이룬다. 핸들을 넘기고 통과.
이르쿠츠크 시내로 들어와 우선 시장에 간다. 시간이 5시 넘으니 거의 파장이라 떨이로 파는 소갈비를 좀 사고, 상추와 양파 등도 사서 숙소를 찾아간다.
시장에 도착해서 숙소에 문자를 보냈는데 떠날 때까지 답이 없어서 슬슬 열이 난다. 지난 번 이르쿠츠크에 도착하던 때의 나쁜 추억이 떠올라 더욱 불쾌하다. 숙소를 잘 찾았는데 여전히 소식이 없어 전화로 한참 호통을 치고 밖에 나오니 리셉션이 바로 앞이다. 좀 머쓱했지만 마중나온 여직원에게 내색을 하지 않고 계산을 치른다. 보증금을 천 루블 달래네. 무슨 이런 아파트 호텔에서도 보증금을 요구하나?
방에 들어오니 다 괜찮은데 잡물건을 수납할 마땅한 탁자 같은 게 없어 좀 불편하다. 어쩔 수 없지. 이런 방이 이틀에 3,456인데 알혼섬의 그 방이 이틀에 3,600이니 관광지라는 게 참 심하긴 하지. 시장에서 사온 갈비를 마눌님이 손질해서 우선 구워 보드카와 밥으로 저녁. 뼈는 내일 아침 국거리로 남긴다. 고기가 느끼해서 커피를 한잔 한 탓인지 잠이 잘 들지 않아 고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