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131 치타 - 마고차 597km
모처럼 호텔 조식인데 규모가 작은 호텔이라 빵, 달걀후라이에 햄 한 조각 등의 식단이 매우 단촐하다. 작은 호텔은 이래서 싫은데 달리 대안이 없지.
출발은 10시. 시내를 금방 빠져나오니 치타가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할 겨를도, 생각도 없다. 데카브리스트의 유형지 중의 하나라는 것, 그나마 이것도 이르쿠츠크에서 알게 된 것이지만, 외에는 치타를 알 수도, 알기도 어렵다.
길은 여전히 좋다. 지난 번 이 길들을 지나면서 겪은 고생의 보답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다. 고도가 다시 높아져서 가끔 1,000을 훌쩍 넘기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풍광도 마냥 밋밋하기만 한 것도 아닌데 지난 번에는 왜 그렇게 오로지 밋밋한 평원만 있다고 생각했을까? 고도가 높고 산이라고 해도 오른다는 느낌이 거의 없이 구릉의 연속일 뿐이니 그럴 수도 있긴 하겠다.
어제 그 싼 주유소에서 기름을 채웠으면 기름 때문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는데 괜히 그냥 지나치고 나니 달랑거리는 기름 채우는 게 꽤 신경쓰인다. 일단 비싼 기름(49.3)을 30리터 넣고 길을 간다. 치타 부근만 기름이 비싼 건지, 앞으로 쭉 비싸질 건지는 아직 모른다.
점심은 역시 길가 카페에서 블리니와 커피, 현숙은 보르쉬와 빵인데 러시아 음식에 정들이기는 정말 힘들다. 트럭 하나가 한국 식품을 광고하고 다닌다.
길이 좋고 차들이 거의 없으니 속도가 절로 빨라져서 오늘 숙소로 예정한 동네에 매우 일찍 도착하겠다는 생각도 들지만, 그건 두고봐야 알지. 45.5에 파는 싼 쥬유소가 있어 기름을 채우러 들어가니, 젠장 기름이 떨어졌다네. 주유소에 기름이 떨어지기도 하는구나. 마침 약간 여유가 있어서 그녕 나왔지만, 만일 기름이 정말 달랑거리는 경우였다면 낭패를 볼 수도 있었겠다. 물론 사정을 하면 몇십 리터 정도는 구할 수 있었겠지.
위도가 올라가니 자작나무들의 단풍이 확연하다. 대부분 노란 색으로 물드는데 아주 가끔 드물고도 귀한 빨간 색이 나오기도 한다. 기온도 뚝 떨어져 차안에 썰렁할 정도라 이제서야 시베리아의 참맛을 보나 싶다. 하지만 이 정도 이러는 건 매우 심한 엄살이다.
점심을 먹고도 한참을 지났는데 졸음이 늦게 찾아온다.마눌님도 졸려해서 오늘은 길가 쉼터에서 잠시 눈을 붙인다. 한 10분 정도 맛있게 자고나니 개운하다. 숙소로 예정한 마고차에는 6시 반 정도에 도착할 것 같아 좀더 가지 않고 그냥 이 이름도 성도 모르는 시골 동네에서 하룻밤 자기로 한다. 마눌님이 맵스미를 찾아보더니 은행도 시청도 큰 마트도 몇 개나 있다며 좋아하는데 가봐야 알겠지? 하늘에는 시커먼 구름이 오락가락하며 비를 뿌릴 듯 말 듯 하더니 마고차 방향에 소나기가 내리는 것 같아 좀 불안하다. 세찬 비를 맞아 차를 씻어주면 좋기는 한데, 숙소로 짐옮기는 게 몹시 불편하지.
마고차로 들어가는 9km 진입로가 왠일로 포장이 되어 시골 동네에 대한 기대가 커진다. 네르친스크 정도의 매우 크고 이름난 도시 진입로만 포장된 줄 알았는데 이렇게 포장도로가 있으니 큰 마을일 거라는 생각이 당연히 들지. 그런데 막상 들어가보니 길만 넓은 시골이다. 우선 눈에 뛰는 마트 카라반에 들어가보니 의외로 물건이 많고 음식종류도 다양한데 쌀은 비싸네. 앞으로 밥해먹을 날이 별로 없으니 이제 쌀은 사지 않아도 된다. 대추야자 같은 것과 물, 소시지를 산다.
부킹닷컴에서 찾지 못 해 구글로 미리 찍어둔 숙소 뚜리스트는 외관이 너무 허름하다. 다른 숙소를 찾아 들어가보니 이건 방이 션찮은데 2천을 달라네. 결국 뚜리스트에 와서 화장실이 딸린 방을 2500에 구한다. 1인이면 2천이라는데, 이런 차등이 필요는 하겠지. 주방을 쓸 수 있어서 밥을 하고 술을 찾으니 없다. 또 아침 호텔에 두고온 모양이다. 유니슨 호텔로만 기억할 치타가 잃어버린 술로 추억거리를 하나 더 보태는구나. 어제 아침 울란우데에서 나오면서는 수박과 달걀을 두고왔지 아마? 매일 하나씩 두고 다니는구나.
길 건너에 있는 마가진에서 평소보다 비싼(750ml에 490루블이면 아주 비싼 것도 아닌데) 보드카 한병을 사들고 와서 저녁을 해결한다. 마트에서 사온 흑빵을 먹어보니 정말 맛없다. 도대체 어떤 인간이 이 빵을 맛있다고 한 거냐?
느낌이 빨리 가기 싫어하는 것 같기도 한데 또 그게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볼 것도 없고 할 일도 없는 블라디보스톡에서 괜히 돈쓰고 시간을 보내는 게 좀 아깝다는 생각에 자꾸 빨리 가라고 보챘는데 잘못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