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134 노보부레이스키 - 비로비잔 - 하바로프스크 503km
지난 밤에 라면을 끓여먹고 나니 할 일이 없어 10시에 잤다고 새벽 4시에 일어난다. 밖에 나가보니 기온이 뚝 떨어져 서리가 내렸네. 하늘엔 별이 쏟아지지는 않지만 총총하다. 이만한 별을 보는 것도 이번 여행에서는 처음인 것 같다.
아래 카페에서 블린과 커피로 간단히 아침식사. 마눌님은 어제 산 빵. 맛이 없다네.
조금 가니 횡단도로 기념탑은 약 1km정도 거리인데, 가스티니차의 다리저는 강아지가 여기까지 와있다. 우리를 따라온 건 아닐 테니, 이 다리저는 강아지의 영역이 이만큼이나 되나 싶다.
여전히 상태 좋은 길로 열심히 달리다가 1시간쯤 후에 교대하고 잠을 좀 자둔다. 노면 상태가 매우 좋다가도 가끔씩 움푹 패인 웅덩이가 느닷없이 나타나기도 하고 어쩌다가 누더기가 되기도 하는 길. 그래서 차도 사람도 자주 힘들다. 여기도 가끔씩 자작나무의 단풍이 눈에 띄어서 시베리아임을 실감한다.
핸들을 넘겨받아 오늘 중간 목적지인 비로비잔에 들어간다. 큰 도시이니 당연히 진입로도 포장되었지만 아무르 길만큼 노면이 좋지는 않다. 이만큼이라도 포장이 되었다는 게 고마울 따름이다. 러시아에서 유일한 유대인 자치구라 해서 온통 유대인들로만 북적댈 줄 알았는데 이제는 2%밖에 살지 않는다네. 한때 유대인으로 넘쳐났던 도시가 스탈린의 학살로 인구가 대폭 줄어든 이후, 흐루시쵸프 시기에 다시 조금 늘었다가 이제 또 줄어들어 그만큼만 남았다네. 히틀러만 유대인을 학살한 게 아니다. 유대인에 대한 호불호는 차치하고, 끝없이 천대받고 박해받으면서도 그 명맥을 꾸준히 이어가는, 사람 자체로서 이들의 생명력만큼은 경탄스럽다. 도시는 그냥 러시아 도시다. 여기서 유대인 전통음식을 먹어보려던 기대는 그래서 접었지만 그래도 식당을 찾아본다.
블로그에 나온 식당 심하(Simxa)는 도시 한가운데에 있는데 길을 찾지 못해 한참을 돌다가 전승기념비가 있는 공원 옆에 차를 세우고 걸어가서 식당에 들어간다. 글을 모르니 주문은 늘 어렵다. 마눌님은 알기쉽고 실패확률이 거의 없는 피자. 나는 구글번역기를 돌려서 송아지 고기요리. 피자는 예상밖으로 맛이 없고 고기요리는 짜지만 최근들어 드물게 성공한 경우. 유대인 전통요리는 아니다.
식사를 마치고 전승기념탑 부근만 잠시 둘러본 다음 다시 길을 떠난다. 러시아 대부분의 도시에는 도시 한가운데에 전승기념탑 같은 게 있어, 2차대전에 희생된 군인들의 이름을 새긴 조형물이 있고 영원의 불을 태운다. 그것이 통치 수단으로 이용되는 것과는 별개로, 나라를 위해 희생된 사람들을 쉽게 추념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다. 여기서는 다른 도시들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무기(탱크, 장갑차, 총포류, 때로는 전투기) 전시가 보이지 않는다. 단지 가는 길에 내눈에 띄지 않을 뿐이겠지.
다시 길좋은 아무르 길로 들어선다. 지금부터는 하바로프스크가 가까운 만큼 마을들도 자주 나타나고, 그래서 길가에 작은 가게를 차린 주민들도 많다. 조그만 바스켓 몇 개에 감자, 토마토, 버섯 등 집 마당에서 키운 듯한 작물을 내놓고 하루종일 손님을 기다리는 주민들. 치타부터 오늘 오전까지의 길은 워낙 마을들이 드물고, 있다 해도 시베리아 또는 러시아 횡단도로 또는 주요 도로와 멀리 떨어져 이런 풍경이 드문데, 마을이 횡단도로와 조금만 가까워도 이런 주민 상인들이 많다. 가끔 제법 큰 규모의 채소상도 보이기는 하나 드물다. 단풍이 드는데도 여전히 수박은 판다.
하바로프스크로 들어오는 초입에 아무르 강을 건너는 큰 다리가 있다. 아무르 강. 중국에서는 해이룽 쟝, 우리말로는 송화강을 지류로 거느린 흑룡강. 몽골에서 발원, 4,444km를 흘러 러시아와 중국의 국경을 이룬다. 아직 하류는 멀지만 하바로프스크 부근의 강폭도 매우 넓고 강 중간 곳곳에 섬들이 있어 잘만 가꾸면 매우 아름다운 풍경이 나오겠는데 그러지 않으니 좀 아깝다. 잘 꾸며졌으면 내일 하루 쉬는 동안에 구경이 좀 될까?
시내로 들어오니 큰 도시답게 차들이 매우 많다. 지난 번에는 비오는 밤중에 들어와 숙소찾느라 정신이 없었고, 아침에는 길떠나기 바빠 교회 하나만 달랑 보고는 그냥 내뺐으니 도시가 어떤지 알 수가 없었다. 어렵사리 숙소를 찾아 좀 늦게 온 주인 녀석을 만나니, 당초 예약한 집에 물 문제가 있다며 다른 집을 보여준다. 그냥 그런 허름한 아파트인데 10층 꼭대기이고 바로 앞으로 아무르 강 전망이 좋아 용서한다.
집앞 마트서 사온 냉동 사태살을 열심히 삶아서 저녁. 고기가 맛있고 국물도 좋다. 내일은 시장에 가서 잡뼈를 사와야지...
추워하는 마눌님을 위해 오랜만에 전기요를 꺼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