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143(9월 19일) 블라디보스톡 출발
술이 모자란 건지 잠이 5시에 깬다. 컴퓨터를 들고 주방에 가서 작업을 계속해본다. 8시 좀 지나 아침을 해먹는다. 국을 끓이려고 했는데 밥솥이 눌어붙는 것 같아서 그냥 누룽지국이나 만든다.
새벽에 신발장을 보니 약 30명 정도가 투숙 중이다. 이런 호스텔을 하면서 여기 돈으로 하루에 40만원 정도 벌면 엄청나게 버는 거지? 매일 이렇게 손님이 오지는 않겠지만 한달에 약 천만 원 정도의 수입이라면 꽤 괜찮은 사업이겠다 싶다.
설겆이를 하는데 물살이 러시아답지 않게 빌빌거리더니 급기야 로만이 오늘 파이프가 고장나서 물이 안 나온단다. 샤워는커녕 세수도 못 하게 생겼다. 이런 낭패가 있나. 급한 대로 이닦고 세수는 고양이 세수. 똥도 빨리 눠둔다.
다시 컴을 보며 정산을 검토하다가 11시 조금 지나 퇴실준비를 한다. 빼먹을 거 다 빼먹고 12시에 호스텔을 나선다. 이래저래 편한 건 아니었지만 그 돈으로 이만큼 지냈으면 잘 지낸 거다. 4박 5일에 외식 한번 하지 않고 술도 적당히 잘 마셨다. 마눌님이 같이 있었으면 아무래도 이런 곳에서 지낼 수는 없으니 비용이 좀 더 들었겠지.
남은 반찬을 깨끗이 비우고 젓갈담은 밀폐용기도 잘 씻었는데 그걸 그냥 건조대에 두고 온다. 뭘 빼먹어도 빼먹어야지. DBS 신태희 주겠다고 부탄가스도 잘 모셔놓고는 두고 온다. 뭐가 그리 급하냐?
항구 페리사무실에 가니 표사는 줄이 엄청나다. 나는 보딩 패스만 받으면 되는데 이렇게 줄을 서야 하나 싶어서 신태희에게 전화하니 가방은 사무실에 두고 나중에 1시쯤에 다시 오라네. 오토바이 친구들에게 들으니 직원에게 이티켓이 있다고 말하면 미리 보딩 패스를 주기도 한다는데 신태희는 왜 그런 말을 해주지 않는 거냐?
그런데 중간에 간난쟁이를 포함한 다섯 식구와 자동차 여행을 하고 돌아가는 친구를 만나 시간을 뺏긴다. 45분에야 급히 술안주로 케밥 하나만 겨우 산다. 혹시 선사에서 식권을 줄지도 모르지만, 점심이나 저녁거리로 햄버거 하나는 더 살 돈이 되는데 아깝다. 항구에 가면서 싼 러시아 담배를 좀 챙겨놓는다는 것도 까먹는다.
이리저리 다니다 다시 사무실에 들어갔다 나오는데 표사는 곳에 마침 아이들 엄마가 표를 받고 있어서 새치기로 보딩 패스를 받는다. 오늘 환율로 116달러는 7,940루블. 딱 100루블 정도가 남아 아이들 주라고 과자 하나를 사서 건넨다. 그런데 식권을 주지 않네. 보딩 패스를 받고 출입국사무소로 가니 신태희는 거기서 고생 중이다. 식권 대신에 할인율이 50%라니, 그걸로 밥을 먹으면 되긴 하겠다. 올 때는 30%를 할인해줬다.
1시 35분 선실에 들어가니 방은 2등실 침대인데 2층 침대 4개가 창문도 없는 감옥이라 산길샘 기록도 어렵게 생겼다. 핫스팟으로 마눌님과 카톡을 하는데 MTC 놈들이 기어이 못 하게 막는구나. 하긴 막는 게 당연하지. 그래도 1시간 가량 식구들과 카톡하며 안부를 전한다. 아직 80루블 어치나 남았는데, 아깝다.
2시 출발인 배는 2시 반이 되어도 떠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러시아인들의 출국수속이 워낙 지체되어 그렇다네. 러시아에서는 무조건 많이 기다려야 한다.
2시 50분쯤에 예인선이 붙어서 접안된 배를 끌어낸다. 작은 놈이 참 힘도 세다. 그래서 출항은 3시. 내일 1시간 늦어지려나? 출항하면 화물칸 내 차로 가서 물건을 가져올 수 있다고 오토바이 젊은 친구가 알려준다. 아이들이 여기저기 묻고다니며 정보를 알아오는 재주가 많네. 선원과 함께 화물칸으로 내려가 차를 보니 반갑다. 이틀만에 보는 거지? 면세점에서 사둔 담배를 잘 챙겨넣었는데 세관에서 꼬치꼬치 파내서 들키면 어쩔 수 없이 뺏기는 거다.
그러고보니 점심을 거른 채 이러고 다니고 있다. 사먹을 만한 음식도 없고 해서 산미구엘 작은 놈 3개를 사서 하나는 젊은 친구 주고 빵같은 과자를 좀 얻어 간단요기를 한다.
할리 타는 말많은 친구가 운이 좋으면 범고래 등의 큰 고래가 지나가는 걸 볼 수 있다 해서 수시로 바다를 보는데 역시 없다. 바다는 파고가 1m라는데 50cm도 되지 않을 정도로 아예 호수다. 동해가 이렇게나 잔잔하다니 참 놀랍다.
저녁밥값이 오른 건지 11,000원이란다. 그 돈으로 그런 음식을 사먹을 수는 없지. 석양은 구름 사이로 보일 듯 말듯 하는 수평선으로 넘어가는데 노을이 조금 아쉽다.
동해 방향으로는 구름이 하늘 가득이다. 시간도 죽일 겸 아침에 하지 못 한 샤워를 하기로 한다. 샤워장보다는 사우나가 낫다. 따뜻한 물이 몸을 담그고 있으니 좋은데 오래 있지를 못 하고 씻고 나온다. 그래도 씻고 나니 개운해서 훨씬 좋다.
배도 고파지고 술도 고픈데 젊은 애들은 자느라 정신들이 없어 허전하던 차에 마침 할리가 사람들을 모은다. 쟁여둔 보드카와 케밥을 들고 2층 식당으로 가서 술을 시작한다. 카드를 두고와서 가족 팀이 치킨과 맥주 사는 걸 보기만 하니 좀 미안하다. 치킨 값이 좀 싸다 했더니 반 마리네. 맥주는 왜놈 아사히밖에 팔지 않아서 할수없이 왜놈 맥주를 마신다. 보드카를 섞어 보맥?을 만드니 딱 좋네. 차에 갈 수만 있으면 한 병 더 가지고와 술을 좀 채웠으면 싶은데 어쩔 수 없지. 이런저런 곡절들을 이야기하다 보니 어느새 10시 반, 식당 문을 닫을 시간이다. 방에 와서 금방 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