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까지 7,715km. 차가 달린 거리라 도상거리와는 좀 차이가 나겠지만, 이제 모스크바까지 약 1,300km가 남은 건 맞다.
페름에서 1박하기로 하고 중간에 숙순에 들러 가능하면 기념으로 사모바르 작은 놈을 하나 사볼까 싶은데 어떨지?
새벽 5시에 잠을 깨니 일출이 황홀하고 아침식사가 훌륭하다. 식당의 시설도 멋지고, 로비나 프런트는 깔끔하고, 위치도 예카테린부르그 역 바로 앞이라 최상인데 방은 개판이니 참 신통한 곳이다.
아침을 배불리 먹고 차는 호텔 앞에 둔 채, 시내 관광을 나선다. 참 오랜만에 관광객 모드네. 러시아 왕조 마지막 황제인 니콜라이 2세 일가가 혁명 이후 이곳에 유배되어 왔다가 일시에 처형 당한 곳. 혁명이 폐위하고 목숨까지 뺏은 황제 일가를 혁명으로 이뤄진 구소련 시절에는 오히려 러시아 정교의 성인으로 만들고, 그 당시 없애버렸던 처형장소를 정교회 성당으로 복원해 관광객을 불러모으는 장사를 한다. 세상은 이래서 재밌지?
짧은 시간, 짧은 관광이었는데 시내에 먼지가 너무 많아 정말 지겹다.
이제는 관광객 모드에서 여행자 모드로 변신해야지. 역 앞에서 점심용으로 케밥 2개를 사들고 11시 47분 출발. 비가 오지 않으면 하늘은 참 깨끗하고 맑아서 좋은데 고속도로도 온통 먼지다. 징그럽다.
예카테린부르그는 우랄 산맥을 넘는 시발점이라 그런지, 어제 다소 고도를 낮추던 고속도로가 오늘은 다시 300이상으로 고도를 올린다. 자작나무보다는 소나무가 좀더 많이 보이고 언덕도 많아지는 등, 풍경이 조금 달라지기는 했지만 평원은 변함이 거의 없다. 그래서 여전히 지겨운 것도 크게 변하지 않는다. 우랄 산맥에 넘을 때 무슨 고개 같은 게 있을 줄 알고 기대를 많이 했는데 도대체 언제 넘었는지 알 수가 없이 넘어왔다.
예카테린부르그에서 40km 정도 거리의, 유럽과 아시아를 나누는 경계에 세운 탑을 찾아 인증샷도 남긴다. 이제부터 아시아를 지나서 유럽이다. 남한 땅 175배 크기의 러시아. 그 중에서 동쪽 약 3/4? 정도가 아시아이고 여기부터 유럽인데 러시아가 아시아보다는 유럽이기를 좋아해서 이 동쪽 시베리아는 거의 황무지다. 하긴 기온변화가 워낙 심하고 겨울에는 영하 50도를 예사로 아는 지역이니 개발하기도 어렵겠지.
우랄산맥이 이 지역에서는 워낙 밋밋해서 산이라는 걸 거의 느끼지 못 한 탓에 내가 고개가 없다는 불평을 하나보다.
오늘은 주행거리가 짧아서 느긋하게 운전을 하는데 트럭 하나를 실선에서 추월하다가 경찰에게 잡힌다. 짜식이 5천을 달라네. 3천으로 흥정해서 끝냈다. 누구는 2천으로 끝냈다는데 이 경찰놈은 도무지 물러서지를 않는다. 내가 이 상황을 좀 빨리 끝내버리고 싶은 생각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경찰에게 돈을 줘보기는 생전 처음이다. 내 불찰이지만 많이 불쾌하다. 기념으로 카페 옆에서 케밥으로 점심을 간단히 때운다.
숙순에 들어가니 사모바르 관련된 것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우리나라 식으로 동네 입구에 관련 매장이 있고 거기서 여러가지를 마음에 드는 놈으로 고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내가 러시아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 호숫가에서 잠시 쉬고 그냥 돌아나와 페름으로 향한다.
페름은 우랄을 넘으며 시베리아가 끝나니 그 광대한 시베리아를 지난 축배나 뭐나 그런 걸 하고 싶었던 내 희망이 어쩌면 뇌물 3천 루블로 박살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오늘 호텔 수속에는 시간이 유난히 많이 걸린다. 외국인은 여권 모든 면을 복사하라는 지침이 있어서 거기에 충실히 따른는 여자 아이 때문이다. 어쩌면 아친스크에서도 그러했을 지도 모르겠다. 방에 짐을 풀고 세탁기를 돌려놓은 다음, 페름 시내를 차로 잠시 둘러보기로 하고 나갔는데 첫 목적지인 레닌 광장인지 또는 동상인지를 찾다가 놓쳐서 그냥 호텔로 돌아온다. 닥터 지바고의 주요 무대인 페름에서 그 흔적을 찾아보는 건 정말 힘들어 아예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허구이기는 하지만 러시아를 알린 주요 계기 중의 하나인 소설과 영화, 그리고 그 작가를 이렇게 푸대접하는 것도 러시아답다고 해야 하나?
호텔이 도시 초입이라 버스 종점인데 마트도 있어서 돼지고기 목살, 물 등을 산다. 호텔 지하 주방에서 고기를 굽고 방에서는 밥을 해서 맥주와 함께 시베리아를 끝낸 기념식.
설거지를 하는데 위층에 숙박한 러시아 녀석이 같이 사우나를 하잔다. 겨우 뿌리쳤는데 담배피우러 테라스에 나가니 그 곳에 다른 러시아 녀석과 같이 놀고 있네. 이런저런 이야기를 구글 번역기를 돌려가며 하다가 남북관계에 대한 질문이 나와서 그냥 끝내자고 했다. 녀석들은 몹시 궁금한 모양이지만 그렇게 복잡한 문제를 설명하기에는 내 지식의 한계, 설명할 시간 여유, 쌀쌀한 날씨, 무엇보다도 말이 통하지 않는 상태 등등으로 불가능하지. 그냥 끝내자고 했다. 녀석들이 기념이라고 라이터를 하나 주길래 담배 1갑씩 앵겼더니 무척 좋아한다. 매우 불공평한 거래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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