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새벽 5시 전에 잠을 깬다. 오늘 일출은 밋밋하네.
1시간 늦춰지니 아침에 더 일찍 일어나지는 것 같다. 7시 반에 호텔의 아침식사를 먹는데 참으로 한심한 식단이다. 오트밀(특히 나는 이 오트밀이 싫다), 달걀후라이, 팬케익 같은 것. 어떤 놈이 이 호텔의 아침을 맛있다고 했는지 원망스럽다. 먹는 둥 마는 둥 겨우 끝낸다. 이 팬케익은 나중에 그 이름이 블린인 걸 알게 되는데 잘 만들면 한 끼 식사로 참 훌륭한 음식이다.
그래도 출발은 8시 33분. 페름을 빠져나오니 도로는 여전히 왕복 4차선으로 넓다. 페름 오기 전의 어느 도시를 지날 때 처음으로 6차선 시원한 고속도로가 깔끔하게 뚫려, 도대체 이 시골에 무슨 일인가 매우 궁금해서 혹시 모스크바가 가까워져서 길이 좋아지는 것인가 했다. 그런데 그건 아니네. 길은 다시 1차선 도로로 돌아간다.
카잔까지 구글이나 맵스미는 560여km를 찍는데 도로의 이정표는 그보다 무려 150km를 더 알린다. 나중에 이 차이는 없어지는데 도무지 영문을 모를 일이다.
어제 경찰에게 당한 이후로 실선에서의 추월을 극히 자제한다. 오늘 가야 할 거리가 그리 멀지 않은 덕분도 있다.
기름을 넣고 조금 지나니 시간이 또 1시간 늦춰진다. 주 이름은 나중에 알아봐야지.
산골 어느 조용하고 먼지없는 공터에서 처음으로 탁자를 펴고 소풍나온 사람들처럼 느긋한 점심도 즐겨본다. 그래봐야 반찬이라곤 늘 먹는 김치, 멸치볶음, 삼엽국화 장아찌에 특별히 양배추이지만.
카잔 가는 길은 아래 위 두 개인데 구글과 맵스미가 공통적으로 알려주는 윗길을 따라 열심히 간다.
타타르 공화국에 들어오니 시간이 또 1시간 늦어진다. 갑자기 시간이 막 늘어나서 오늘은 26시간을 살게 생겼네. 여유가 있어서 마치 횡재한 느낌이다.카잔 크렘린의 하얀 성벽이 노을에 물드는 멋진 광경도 즐길 수 있겠다는 기대에 가슴이 부푼다.
잘 가는데 갑자기 20km의 비포장 길이 나온다. 길이 너무 험해서 조심조심 40여 분을 가니 강을 건너야 하는 곳이 나온다. 구글은 분명히 페리가 있다고 하는데, 마침 뭔가를 기다리는 사람이 배가 없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조그만 보트를 타고 건너오네. 사공에게 물어보니 페리는 없단다. 어떻게 이런 일이... 기가 막히네. 구글과 맵스미를 철썩같이 믿은 게 참사를 부른 첫 번째 실수. 카잔을 150km 앞두고 이런 참사가...
다시 돌아가 제대로 된 길을 찾기로 하니 돌아가는 마음이 바빠진다. 올 때보다는 길이 좋은 것 같아 속도를 좀 낸 것이 두 번째 실수. 아마 어디선가에서 부딪힌 돌이 기름탱크를 박살냈을 것.
가다보니 마을이 나와서 잠시 길을 찾기 위한 성급한 후진이 세 번째 실수. 차가 길옆 진창에 빠져버렸다.
이런 일이 생기다니 참으로 기가 막힌다. 너댓 가구밖에 없어보이는 동네의 사람들이 거의 모두 나와 차를 빼기 위해 애를 써준다. 그 와중에 이상한 기름 냄새가 나서 살펴보니 기름탱크에서 기름이 줄줄 새고 있는 걸 발견한다.
다른 차에 연결해 차를 빼다가 실패해서 시동을 걸어둔 채 문을 닫은 게 마지막 실수. 이 놈의 차가 왜 키가 꽂혀 있는데도 문이 잠겨버리는 거냐?
참사 종합세트네. 차는 빠져 있으면서 차문이 잠겨 바퀴는 계속 돌아가고, 마눌님은 겨우 가위 하나만 들고 나와 어찌 해보려고 애만 쓰다 포기하곤 낙담해서 앉아 있고, 도와주려고 열심히 애쓰는 동네 사람들과는 말도 통하지 않고.
어찌어찌 또 구글번역기를 돌려 구난차를 불러달래니 1시간 쯤 후에 기술자가 와서 차문을 연다. 기름이 다 새버려서 다시 동네 사람에게 기름 20리터를 산다. 약 3시간 만에 탈출에 성공한 셈이다. 지난 번에도 경험한 바인데 러시아 사람들은 정말로 순박하고 친절하다. 참으로 고맙다. 구글 때문에 망한 길인데 결국 구글 도움을 받아 난관을 헤쳐나왔으니 이 놈의 구글이 정말로 병주고 약주는 셈이다. 구글을 어찌해야 쓰까이???
기술자를 따라 정비공장이 있는 키르메즈까지 40km를 죽어라고 달리기 시작한다. 얼마 못 가서 20리터 기름이 다 새버려, 이 길을 오면서 보고는 이런 곳에도 주유소가 있네 하며 신통해하던 그 주유소에서 기름을 천 루블(@37, 27리터) 어치 넣고 정비공장에 도착한다.
처음에는 고칠 수 없다고 하는 것 같아 낙심천만이었는데 고칠 수 있다네. 차를 들어올려서 바닥을 보니 기름탱크 앞 부분이 찢어졌다.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이 중요한 기름탱크가 찢어지게 만들면 어떻게 하냐 이 나쁜 기아차 놈아. 약 2시간 정도 걸려 드디어 수리가 끝난다.
기다리는 동안 카잔 숙소를 기한 14분 남기고 취소한다. 그나마 다행인가? 키르메즈 정비공장 주변 동네를 한 바퀴 둘러본다. 예쁘게 창문을 장식한 새 집이 많다. 오면서 줄창 보는 것인데 러시아에서는 창문과 담장을 예쁘게 장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모양이다. 집집마다 똑같은 장식이 없이 다 다르다.
돌아오니 수리가 거의 끝나간다. 7시 30분에 주유소에 가서 기름 20리터(@43, 860루블)를 넣고 공장으로 돌아온다. 우리가 길을 몰라 하니까 기술자가 영어를 하는 아줌마를 불러 길을 알려주게 하네. 참으로 친절한 사람들.
드디어 수리가 끝났다. 수리비는 760루블밖에 받지 않는다. 하긴 때우는 무언가를 바르고 기다린 것 외에는 없으니 많이 받을 수도 없겠다.
8시 도와준 사람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알려준 대로 북쪽 길로 떠난다. 시간을 빨리 늦춰서인지 해가 벌써 지면서 노을이 기막히다. 사고가 나면 주변 풍경이 늘 아름다운 건 왠 까닭일까?
나중에 생각해보니, 차가 진창에 빠지고 문이 잠긴 건 불행 중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만일 차가 진창에 빠지지 않았더라면, 기름통이 찢어져서 기름이 새는 줄도 모르고 가다가 막막한 비포장길 한가운데에서 누군가 도와줄 사람이 나타나기를 한없이 기다리는,더욱 질나쁜 참사가 발생했을 것이다. 또 차문이 잠기지 않았다면 진창에서 차가 빠져나와도 그 기술자 없이 어떻게 정비공장을 찾아 기름탱크를 수리할 수 있었을까 생각하니 참 끔찍하다. 궁즉통이라 했다.
긴장이 풀린 데다 어두운 밤길이라 운전이 몹시 힘든데 숙소는 보이지 않는다. 갈림길 부근에서 다시 기름을 넣고 맵스미가 찾은 동네 숙소를 동네 가게 아이와 함께 차를 타고 겨우 찾아가니 이번에는 방이 없다네. 마지막 참사라고 칠까?
카잔가는 길로 접어들어 최악의 경우에는 차박이라도 한다며 가다가 겨우 찾아낸 가스티니차. 방도 있고 밥도 있다. 너무너무 반갑고 고맙다. 10시 반에 맥주(93)를 곁들여 맛없는 저녁식사(170)를 끝내고 방으로 돌아온다. 짐을 가지러 차에 가는데 트럭 기사아이들이 놀다가 말을 걸면서 동전을 바꿔달라네. 마침 차에 있던 100원 동전 2개를 그냥 줬더니 무척 좋아하네. 기념으로 사진을 찍는다. 10시 55분. 참으로 어이없고 황당하고 기막힌, 26시간의 긴 하루가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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