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시 기상. 예보대로 안개가 자욱하다. 오후에는 걷히고 해가 나오겠지 했는데 10시 경에 햇살이 조금씩 비쳐서 좋다.
아침은 혼자서 라면. 마눌님은 이 집에 있는 밀가루로 감자전을 부쳐서 오랜만의 흰 밀가루라 행복해 한다.
그런데 많이 오는 것도 아니고 그냥 부슬거리는 비가 도무지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좀 그치기를 기다리며 숙소에서 DVD를 보며 시간을 죽이다가 일단 나가보기로 한 시간이 12시 20분이다.
시내까지 걸어가면서 동네의 이런저런 풍경을 본다. 이발소 그냥 머리자르는 게 200크로네이니 여기서는 머리자를 엄두를 내지 않는 게 좋다. 외과에 있는 숙소에서 도심으로 가려면 다리를 건너야 한다. 낮게 깔린 구름이 계속 비를 내리다말다 하고 있으니 다리를 건너면서도 전망이라는 게 없어 사진찍는 재미도 없다. 다리를 건너 중세의 요새같은 베르겐 대학교를 통과해서 KODE 중의 하나를 들어갈 예정이었으나 입구를 찾지 못 하고 포기한다.
카페 막달레나인지 뭔지를 찾아 점심을 해결하려고 부근을 헤맸지만 시간만 축내고 도저히 찾을 수가 없네. 결국 점심은 어시장 앞의 서브웨이에서 해결한다. 140크로네. 크지도 않은 도시에서 뭘 찾기가 이렇게나 힘들다니...
노점 어시장을 지나는데 호객행위가 대단하다. 베르겐에도 한국인 관광객이 많지. 이 동네 토속음식을 좀 먹어보고는 싶은데 션찮은 맛을 매우 비싼 값에 먹는다는 게 싫어서 엄두를 내지 않는다. 노르웨이 사람들은 이 비싼 식당 음식을 어떻게들 사먹고 살까 또 궁금해진다.
건너 편 Brygge지구로 간다. 한자동맹의 본거지는 도대체 어디인가라는 잠시 궁금해졌는데, 중세 유럽 전체를 아우르며 장사하는 동맹이니 굳이 그 본거지를 찾는다는 내가 우습다. 탈린에도, 투르쿠에도, 이곳에도 곳곳에 그 흔적이 남아 옛날 그 시절과는 좀 다른 방식인, 기념품 가게와 식당, 호텔 등으로 장사를 한다.
한자동맹의 흔적이 있다는 건 중세의 대표적인 흔적 중의 하나인 돌 포장길이 아직도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고, 그래서 걷는 사람들의 발바닥을 매우 불편하게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오래된 목조건물들이지만 사람이 살고 있으면 건물도 같이 사는 법. 이 동네 전형적인 목조건물 16채, 그리고 1900년대 초에 지어진 석조건물 9채 등이 부둣가에 밀집해 옛 영화를 전세계 관광객에게 각종 기념품을 팔며 자랑한다. Thollite라는, 색깔이 현란한 돌로 만든 목걸이 하나를 딸에게 사주려고 몇 번이나 만지작거리다 만다.
뒷골목에는 엄청나게 큰 명태(생기기는 명태처럼 생겼는데, 이 동네에서는 대구를 많이 잡으니 아마도 대구일 것) 말린 놈을 조각으로 만들어뒀다. 재밌다.
바로 옆 베르겐후스 요새(후스가 요새라는 뜻인 듯)에 가서 잠시 구내를 둘러본다. 옛날 왕의 궁전이던 로젠크란츠 타워는 공사 중이고, 그 옆의 고풍스런 건물 한 채가 사방을 감시하는 선원들의 흉상을 모퉁이마다 달고 섰다.
마눌님이 찾아낸 3번 루트를 따라 길건너까지 연장된(사실은 요새 중간으로 길이 나고 사람들이 살게 된 것이지만) 요새에 바위를 타고 올라 바다와 도시를 본다. 어디든 올라가는 건 좋지.
물론 베르겐에도, 걸어올라가도 되고 열차를 타면 10분에 오르는 Floeyen 전망대라는 곳이 있지만 오늘처럼 비구름이 가득한 날에 올라봐야 보이는 게 없으니 괜히 돈 쓰거나 힘을 뺄 일은 아니지. 그러니 이곳 무료 전망대의 훌륭한 전망이 훨씬 값지다는 생각을 한다.
요새에서 내려오니 배가 또 고프다. 빵을 먹으면 배가 빨리 고파진다. 마트에서 풀빵과 아이스크림을 22크로네에 사서 브뤼겐 벤치를 즐긴다. 이 동네 참새들은 사람들이 주는 먹이에 익숙해져 벤치에서 누가 뭘 먹기라도 하면 날아와 부스러기를 주워먹는 데 이골이 났다.
놀다보니 시간이 많이 흘러 5시에 문닫는 박물관은 입장시간이 지나버렸네. 걸어다니면 몹시 피곤한 법. 게다가 마눌님이 허벅지 부근이 당긴다며 불편해 하는데 치료법은 일찍 숙소로 돌아가 쉬는 것밖에 없지. 그 와중에 맵스미의 도움으로 안경점을 찾아 도수높은 돋보기를 하나 더 산다. 역시 75크로네.
백야라고 하지만 위도가 낮은 이 지역의 해는 11시 넘어서 지는데, 그래도 저녁이 되면 날이 어두워져서 조명이 들어온다. 어두워지면 청춘들이 밖에서 놀기 더욱 좋아지는 법. 그래서 낮에 관광객으로 붐비던 공간은 청춘의 몫이 된다. 피곤하지 않으면 그들의 활기를 같이 느껴볼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그냥 아쉬워하기만 한다.
버스(37크로네)를 타고 숙소로 돌아와 고등어를 굽고, 김치도 볶고, 마트에서 산 햄버거 패티도 구운 데다가 아침에 마눌님이 남긴 감자전까지 보태니 지금까지 지내면서 가장 반찬이 많은 식탁이 되었다.
술이 없이 어떻게 지내나 걱정을 많이 했는데 오늘도 술없이 생선과 고기를 잘도 먹는다. 세상의 모든 음식이 안주이듯, 세상의 모든 음식은 그냥 음식이기도 하다.
저녁이 되어서야 해가 나와서, 전망만 좋은 숙소에서 11시가 다되어 가는 시간에 노을도 즐겨본다.
베르겐은 그다지 매력적인 도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다락같은 물가가 결정적이긴 하지만, 노르웨이 어디나 물가는 이 정도 수준이니 물가가 베르겐의 평가에 발목을 잡는 건 아니겠지?
베르겐에는 KODE라 부르는 미술관 또는 박물관이 시내에 4곳이나 있어서 뭉크, 달 등 유명 화가의 작품과 현대 미술품을 전시하고 있다. 또 그리그의 고향이라 외곽 트롤하우젠이란 동네에 그의 생가가 있고 점심에는 런치 콘서트도 한다. 이 미술관과 박물관을 그냥 지나친 이유는 일단 일정을 핑계로 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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