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여행/유라시아 횡단

D+144 동해거쳐 집 도착. 여행 끝

나쁜카카오 2018. 12. 5. 11:12

눈을 뜨니 3시쯤이다. 한국 영해로 들어온 건가? 아마 북한 쪽일 듯 하다. 갑판에 나가보니 바다는 여전히 잔잔하고 하늘엔 별이 없다. 깜깜해서 아무 것도 볼 수 없는데 아마 구름도 좀 끼었을 것이다. 조그만 새들 서너 마리가 배를 따라 나는데 어떤 종류인지 몹시 궁금하다. 한밤중 망망대해를 날아다니는 녀석들 크기가 참새 정도라 더욱 신통하다. 

다행히 다시 잠이 들어 5시에 깬다. 지독하게 느리게 흐르는 시간을 갑판 3개를 열심히 돌아다니며 어찌어찌 보내다 보면 아침식사 시간도 되기 마련이다. 3층 갑판에는 비가 오니 물이 고이는데 사람이 느끼지 못할 정도의 약한 롤링에도 물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게 재밌다. 내일이 추분인데 해가 동북쪽에서 뜨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모를 일이다. 



아침은 사먹는다. 7천원. 단체팀 외에는 사먹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빈 반찬통은 채우지를 않는구나. 러시아 사람들이 많이 타긴 했어도 아침을 사먹는 사람이 왜 없는지 궁금하지도 않은 모양이다. 아침을 먹고나도 시간은 여전히 많이 남는다. 잠을 좀 채워보려고 잠시 누웠다가 금방 일어난다. 2층 식당에서는 TV가 방송되어 뉴스를 볼 수가 있다.

백두산에는 벌써 눈이 쌓여 하얗다. 문재인과 김정은이 나란히 백두산을 오르는 이런 날이 오다니, 정말 감개무량하다. 대통령 하나 바뀌면 나라가 이렇게 달라진다. 쥐새끼가 만일 이 뉴스를 볼 수 있다면 무슨 생각을 할까? 그 대가리는 돈과 수꼴들 생각으로 가득찼을 테니, 봐도 아무런 느낌이 없을 게 틀림없다. 김정은이 올해 안으로 서울에 답방하겠다니 서울에서 엄청난 선언이 예상된다. 나라의 앞길이 더욱 밝아진다. 가까운 시일 내에 내 차로 백두산을 갈 날이 올 수도 있겠다.

도착 2시간 전에 한국 데이터 신호가 들어온다. 약 60km의 거리이니 충분히 가능할 터. 매우 반갑다. 그런데 배터리가 달랑거리네. 1등실을 잡은 아기 아빠에게 부탁해서 30분 정도 충전한다. 1등실에는 화장실도 있는데 좀 좁다. 

비가 계속 내린다. 중부 지방은 오후 늦게까지 비가 내린다네.


1시간 늦게 출발했다고 12시 10분에 도착하겠다더니 12시 44분에야 접안을 완료하고는 바로 내릴 수가 있어 좋다. 러시아에서는 접안하고서도 40분이나 기다리게 하더니... 빨리 나오다보니 2번째로 입국심사대를 통과하고 짐검사도 간단해서 바로 빠져나오니 12시 54분이다. 이렇게나 빨리 나오다니...


차주들이 다 나와 차를 찾으러 다시 세관으로 간다. 배 안으로 들어가서 차를 가지고 나와 세관 검사. 비도 오고해서 검사가 매우 간단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담배를 좀더 사올 텐데 하고 아쉽긴 했지만, 사람이 앞일을 다 내다본다면 무슨 짓을 하게 될지 모르는 일이지? 같이 입국한 오토바이들과 사진을 찍고 헤어진다. 언제 또 만나겠어? 

비오는 세관을 1시 43분에 빠져나와 동해시 수산물시장에 물회와 소주를 찾아가는데 찾을 수가 없다. 5년 전에 갔던 그 항구 시장은 찾을 수가 없다. 할수없이 해송회센터에 갔는데 차 세울 곳이 없네. 포기하고 나오다보니 물회식당이 하나 보여 들어간다. 물회와 소주로 점심을 먹고 동해 출발. 멀리 가야 하는데 소주를 마신 건 좀 지나친 짓이다. 오다가 너무 졸려서 갓길에서 잠시 눈을 붙였는데 경찰이 와서 쉼터나 휴게소로 가라고 깨운다. 음주측정을 하지 않은 건 천만다행한 일이다. 

이렇게 시간이 자꾸 지체되니 노량진에 들러 킹크랩을 사기는 글렀다. 마눌님과 통화해서 킹크랩을 포기한다 하고 88로 들어섰는데 역시 정체가 대단하다. 결국 집에는 7시 반이나 되어서야 도착한다. 이런 길을 낮술마시고 노량진까지 들리겠다고 욕심을 부렸으니... 애시당초 양평을 포기한 건 정말 잘한 생각이다.

아이들과 146일만의 반가움을 덤덤한 해후로 대신하고 저녁은 아들의 20만원 짜리 레드와인과 치킨으로 무사 귀환을 축하한다. 집이 좋다.


4월 28일에 서울을 떠나 9월 20일에 돌아가니 146일만인가? 러시아, 핀란드, 에스토니아,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프랑스, 스위스, 리히텐슈타인,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루마니아, 몰도바, 우크라이나, 폴란드, 리투아니아, 라트비아를 거쳐 다시 러시아. 21개국, 44,000km. 이 길고 먼 나날에 내가 느낀 건 무엇일까?

애시당초 무엇을 느껴보겠다고 시작한 여행은 아니었지. 언젠가 마눌님이 당신은 왜 여행을 하나? 하고 물었을 때 딱히 대답할 말이 없었다. 나는 왜 여행을 좋아하는 걸까? 어쩌면 그냥 떠나고 싶은 역마살 때문인지도 모른다. 또 어쩌면 내 삶의 구멍들을 확인하고 싶었는지도 모르지. 조급함. 허둥거리기. 잊어버리기. 박물관 등에 들어가지 않는 건, 이제 보고 나오면서 본 걸 잊어버리는 나이 핑계를 댄다. 

아직 갈 곳도 많고 시간도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