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여행/유라시아 횡단

D+20 모스크바 관광 1일차

나쁜카카오 2018. 11. 6. 10:43

새벽 5시 반에 눈을 뜨니 비가 오는데 9시까지 내린다는 예보가 맞는지 7시 반 무렵에 거의 그치고 저멀리 하늘의 구름이 걷히기 시작하네.

사흘 동안 머무른다고 마음이 느긋해진 현숙이 잠을 푹 자서 아침도 걸르고 기아서비스에 간다. 통역을 붙여준다더니 영어가 조금 되는 직원(어제 말하던 Kirill이 통역이 아니고 서비스 직원 이름이었네)을 붙여주네. 어렵사리 엔진오일 교환과 연료탱크 수리 확인을 요청했다. 8,400루블 정도, 돈이 많이 든다.


비가 부슬거리는 길을 열심히 걸어 구글이 알려주는 대로 버스를 타러 간다. 길이 자주 헷갈린다. 저녁에 오면서 확실히 느낀 점이지만, 너무 구글에 의존하다보니 지도를 보고 방향을 확인해서 내 위치를 정확히 아는, 내 원래의 능력이 급격히 떨어지는 것 같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경로 정도만 구글을 쓰고 그외는 내 지도보기 능력을 부활시켜야 할 것.

버스비는 55루블. 시골 동네에 비해 역시 모스크바는 비싸다. 버스가 어찌나 느긋한지 도무지 속도가 나지를 않는다. 좋은 일이지? 버스타고 보는 풍경은 완연한 유럽 도시인데 규모가 본고장 유럽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크다는 차이. 계속 확인하며 놀라는 것인데 건물규모가 어마어마하다. 약 30분 정도 걸려 볼쇼이 또는 발쇼이(그냥 익숙해진 대로 볼쇼이라고 하자)극장 앞에 내린다. 극장 건물과 주변 건물들이 만들어내는 그림이 좋고 관광객이 엄청나다.


공연예약은 수 개월 전에 이미 마감된다는 말은 들었지만 매표창구에 가보니 실감이 난다. 모니터에 보이는 공연장면이 시골 블라디보스톡의 공연과는 비교가 안 된다. 이러니 전 세계에서 볼쇼이 볼쇼이 하지. 나중에라도 와서 공연을 볼 기회가 있을까? 발레나 연극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나도 가능하다면 보고 싶어지기는 할 정도다.

극장을 나와 해가 숨바꼭질하는 광장을 건너 크렘린을 향해 간다.

밥을 먹어야 하니 현숙이 찜해둔 굿맨 식당에 들어갔는데 런치메뉴는 주중에만 적용된단다. 가격이 매우 비싸다. 하긴 전 세계에 이름을 알린 식당이니 당연한데, 모스크바에 와서 굳이 이 비싼 스테이크를 먹을 이유는 없다 싶어 바로 나온다. 화장실도 좋네.

식당 바로 앞 광장에서는 물고기 축제가 열리는지 다양한 물고기를 얼리거나 얼리지 않거나 해서 파는 부스가 많고 사람들도 많이 사간다. 축제현장에는 늘 있는 놀이패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혹시 요기할 만한 게 있나 헤매다가 포기한다. 마땅히 앉아서 먹을 장소도 없고, 결정적으로 현숙이 생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탓이다.


 버거킹을 찾아 가는 중에 그야말로 엄청난 인파의 관광객 떼를 만난다. 세계 여러 곳을 다녀봤지만 이렇게 관광객이 말그대로 구름처럼 몰려 있는 곳은 정말 처음이다. 모스크바에 관광객이 이렇게나 많을 줄은 전혀 상상조차 하지 못 했는데, 내가 그만큼 무지한 것이겠지? 인파 사이사이로 레닌이나 스탈린 등의 분장을 하고 사진장사를 하는 인간들에게 붙잡혀 현숙이 거의 강제로 사진을 찍히고 돈을 뺐긴다. 500이나 달라네. 100만 주고는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우리는 이런 사진을 돈주고 찍는 거 절대로 안 하는데...

헤매고 헤매서 광장 지하에 무지막지한 규모로 조성된 쇼핑몰 3층 버거킹에서 햄버거로 아침 겸 점심. 러시아에 와서 지난 번에는 KFC, 오늘은 버거킹. 미국 음식에 우리 입이 길들여졌나? 아니면 러시아 음식이 맞지 않는 건가? 아니면 그냥 편해서? 이 지하 3층에는 왼갖 음식이 다 있어서 밥먹기는 매우 편하게 생겼다. 버거 2개에 400루블이면 싸긴 하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니 비가 억수같이 쏟아진다. 다시 버거킹으로 들어와 잠시 비를 피하고 나오니 정말 비를 피했다.

크렘린 표를 사러 가는 길에 성벽 구경도 하고 사람 구경도 하고 부동자세로 서서 영원의 불을 지키는 보초들을 불쌍한 눈으로 봐주기도 하는데 매표소까지가 너무 멀다. 이 놈의 나라는 뭐든지 크고 멀다. 표사는 것도 입장가능 건물에 따라 가격이 다른데 우리는 크렘린 내부광장 견학만 할 거니 가장 싼 250루블을 살 예정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늦다고 싼 표는 팔지를 않는구나. 우리도 이렇게 배부르게 관광지 장사를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그래서 러시아가 매우 미워졌다. 할수없이 500루블 표를 산다.

입장하는 것도 줄서야 하고 거기에 검색대 통과까지. 지하철 타는 데 검색받아야 하는 중국보다는 낫다는 생각이 든다(하긴 여기도 기차탈 때는 검색대를 통과해야 한다). 시설 보안을 위해서라기보다는 뭐든지 통제하고 국민들보다는 지배자나 정부의 편의가 우선되는 독재국가의 잔재가 아닐까 싶다. 우리도 그런 세월을 겪어왔지.


참으로 어렵사리 크렘린에 입장하니 당연히 관광객 천지다. 눈에 보이는 지붕마다 금빛 찬란한 양파모양인데, 저 금빛들이 다 순금이라면 돈이 얼마나 들었을까 싶어, 그 돈을 대느라고 허덕였을 백성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을 하는 척 한다. 500을 내고 250짜리 구경만 하려니 본전생각이 난다. 그래서 괜히 그 놈의 교회 2곳을 들어가 본다. 문앞을 지키는 경비는 표를 거의 확인하지 않으니 싼 표가 다 떨어졌다는 매표소 판매원의 말이나, 시간별로 관람을 진행한다는 안내판의 표기는 수입을 올리기 위한 방편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퓌센의 노이쉬반슈타인 성 관람이 생각난다. 차는 다 끝나서 8시 전까지 찾으러 오라고 문자도 오고 전화도 온다.

크렌린 옆에 붙은 붉은 광장(원 뜻은 예쁜 광장)으로 나오니 유명한 바실리카 성당이 바로 코 앞이다. 이 성당은 1560년에 이반 4세의 명령으로 지어졌는데 너무 아름다워서 다시는 이런 건물을 짓지 못 하게 장인의 눈을 뽑아버렸다는 소문도 있지. 

나는 왜 붉은 광장에 와보고 싶었을까? 와보고 싶었던 것에 비해선 감회는 그다지 감개무량하지는 않다. 붉은 광장은 사진으로 보던 것보다는 좀 작은 느낌인데, 나중에 굼 백화점 안에서 찍은 사진으로는 매우 커보인다. 인간의 눈이라는 건 늘 간사하다. 레닌 묘지도 본다. 목전에 다가온 월드컵 준비 때문에 광장 일부가 막혀 바실리카 성당의 전모를 전체적으로 담지 못한 건 좀 아쉽다. 내일 다시 온다고 해도 사정은 마찬가지겠지.

광장에 이어진 굼 백화점에서 누구나 먹어야 한다는 아이스크림(개당 50루블)도 사먹는다. 맛이 있긴 하네. 백화점에서 나오니 거리 위를 작은 등으로 장식해서 참 보기가 좋다. 구글을 보니 지하철이 빠르네. 


지하철도 55루블. 좀 올랐다.길고 긴 에스컬레이트를 타고 내려가 금방 오는 지하철을 탄다. 3구간 가는데 10여분이 소요되니 역 사이가 많이 먼가 보다. 역시 길고 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오니 바로 출구인데 지하철 역에 화장실 등의 편의시설이 전혀 없어보인다. 사람들이 불편할 거라는 생각은 전혀 없이 그냥 이동만 하라는, 관료들에게만 편리한 발상의 결과일 것이다.

기아서비스까지 한참을 걸어오는데 또 길을 기억하지 못 해서 이제는 나보다 길을 더 잘 기억하는 현숙의 지청구를 듣는다. 맛이 이렇게 가면 안 되지. 이상이 없다면서 앞 바퀴 브레이크의 디스크가 많이 마모되었단다. 물건이 오는 데 6일이나 걸려서 여기서는 수리가 안 된다니 좀 불안해진다. 노르웨이는 고개가 많아서 브레이크가 나쁘면 안 되는데, 천상 상트 페테르부르그에서 다시 서비스센터를 가야 하나? 카니발이 거의 없는 이 동네에서 상트라고 그 디스크 패드를 쉽게 구할 수나 있을까?

차를 찾아오면서 길가 마트에 들러 맥주와 소시지를 사고 호텔로 들어온다. 오늘은 구글이 길을 제대로 찾는다.

호텔 저녁뷔페를 먹으러 갔더니 참 먹잘 게 없다. 하긴 680루블, 우리 돈으로 만원 조금 더 되는 뷔페에 뭘 바라겠어? 하지만 우리는 그냥 나와 피자를 먹으러 갔는데 가져가면 15% 할인해준다는 말은 극히 일부 피자에만 적용된다네. 도시로 올수록 러시아 인간들이 싫어진다. 시골사람들은 참 순박하고 친절했는데, 도시는 세계 어디서나 다 마찬가지이겠지?

마트에서 사온 맥주를 피자와 함께 비우니 술이 빨리 올라 10시도 되기 전에 잠자리에 든다. 8.1도 짜리 맥주.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