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을 매우 잘 자고 눈을 뜨니 7시. 하늘이 화창하다. 사흘 내내 비로 우리를 괴롭히던 하늘이 모스크바를 떠나는 날 이렇게 맑게 개는구나. 괘씸하다. 나흘만에 만나는 햇빛이 너무 좋아서 아침에 잠시 북유럽 사람이 되어 햇빛을 즐긴다. 아침은 선선한데 이러다가 낮에는 더워지겠지?
아침은 호텔 뷔페를 맛보기로 한다. 식단이 매우 훌륭해서 여기서 아침먹기로 한 건 참 잘한 짓이라는 생각이 든다. 러시아의 거의 모든 음식이 다 있는 거나 아닌가 할 정도로 다양하네.
그런데 뷔페란 게 어디서나 그렇듯이 한 바퀴 돌고나면 딱히 먹을 게 없는 건 마찬가지다. 그래도 오늘은 골고루 맛이라도 보자 하고 열심히 접시를 실어나른다. 러시아 빵은 그다지 맛있지 않다. 아이슬란드 마지막 날의 호텔을 빼면 이번 여행에서 마지막 호텔이니 좀 아쉽네. 호텔을 하나 더 잡아볼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어디서 날짜를 빼나? 이틀간 매너팁을 1달러씩 놓았는데도 룸 서비스가 엉망인 메이드가 괘씸해서 오늘은 매너팁 없이 그냥 나간다. 하긴 그동안 러시아 호텔에서 1박씩 머물면서 매너팁은 쭉 생략했다.
모스크바를 너무 쉽게 생각하고 사흘 동안 뭘하고 노나 하고 생각한 건 참 멍청한 짓이라는 생각이 들긴 한다. 세계에서 가장 넓은 나라의 수도로서 수백 년을 이어온 세월을 너무 가볍게 본 탓이다. 그랬으면서도 붉은 광장 3회에 국한된 극히 지엽적인 관광은 좀 많이 아쉽다. 이럴 때는 시간 핑계를 대는 것이 가장 편리하다.
정리하고 어쩌고 하다보니 출발은 11시 11분이다. 구글에게 안내를 맡기고 잘 따라가는데 외곽순환을 벗어나는 지점에서 M11 고속도로를 타라기에 올랐더니 새로 만들어진 도로가 매우 좋다. 새로 만들어졌으니 당연한데, 왜 이 당연한 게 신통하지? 그런데 통행료를 받는 곳이네. 러시아에 와서 처음으로 통행료를 내는 도로다. 그래서 화장실도 무료네. 신나게 한 20km 신나게 달리니 금방 끝나는데 통행료가 450루블이다. 세상에 이렇게나 통행료가 비싸다니 짧게 끝나기가 천만다행이다 했다.
일반도로로 가다가 다시 고속도로로 진입하라 해서 타이밍을 놓친 탓에 들어섰더니 역시 그 M11이네. 또 비싼 통행료를 내야 할 테니 오늘 점심은 굶어야겠다며 빠져나갈 곳만 찾는데 도통 나오질 않는다. 새로 닦여 신나게 달릴 수 있는 고속도로인데도 다니는 다른 차는 없이 나 홀로 달리는 구간이 많다. 그러니 비싼 통행료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네.
60km쯤 달리니 겨우 나들목이 나와 잘 됐다 하고 빠져나왔는데 이번에는 통행료가 140밖에 되질 않네. 도대체 러시아 고속도로의 통행료 부과기준은 뭔가? 아까는 4차선이라서 비싼 건가? 그리 비싸지 않으니 다시 고속도로로 진입한다. 이번에는 제한속도조차 130으로 올라간다. 차도 좀 많아졌네. 80km 정도 신나게 달리니 공사 중이라 길은 끊어졌는데 구글은 계속 가란다. 구글의 오류가 걱정스럽다. 그런데 이번에는 통행료가 220루블. 정말 알 수가 없다. 욕이나 해야지.
주유소에서 기름 천 루블 채우고 점심. 정말 맛이 없다. 아침에 좋은 음식을 먹어서가 아니라 음식 자체가 정말 맛이 없다. 그래도 가자미튀긴 건 좀 먹을 만 하다. 앞으로 길에서는 가능하면 생선요리만 먹자고 생각하려는데, 앞으로 러시아 도로의 식당에서 밥먹을 일이 없네.
상트 페테르부르그(또는 상뜨 뻬떼르부르그, 이름이 징그럽게 길고 발음이 어려워서 정말 싫다)가는 길은 어쨌든 신통하다. 특히 도시 진입 전 약 100km 거리를 직선으로 달리는 건 정말 지겨운 경험이었다. 상트 페테르부르그 진입할 때 혹시 '여기부터 상트 페테르부르그입니다 환영합니다' 까지는 기대하지 못 하더라도 적어도 여기부터 상트 페테르부르그입니다 라는 팻말 정도는 있을 줄 알았고, 그래서 러시아 횡단 기념식이라도 할 참이었는데, 어느새 시내로 들어와버렸다. 젠장이다. 이 키릴 문자는 생긴 것도 어려운 데다, 러시아 이름들이 모두 길어서 이정표를 읽는 게 너무 힘들다. 20일이 지나도록 익숙해지질 않으니 결국 이런 상태로 러시아를 떠나게 생겼다.
구글이 알려주는 대로 민박집을 열심히 따라갔는데 얼씨구나, 엉뚱한 곳에 데려다주네. 참 대책없는 구글인지, 아니면 목적지를 잘못 찍었을지도 모를, 대책없는 모씨인지는 모르겠다. 다시 주소를 찍고 10분 정도 가니 민박집은 시내 한복판이다. 도착시간은 9시 32분. 드디어 러시아대륙 횡단을 무사히 마친 거다. 여기까지 주행거리 10,736km. 이 먼 거리를 조수석에 앉아 고생한 마눌님이 정말 고맙다. 마눌님이 아니었으면 참으로 엄두가 나지 않았을 여정임에는 틀림없다. 오는 내내 만일 혼자서 이 길을 다시 가라면 절대로 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여기는 고층아파트가 없이 4-5층 짜리 높이가 거의 같은 옛날 건물들만 있는 동네라 몇 층까지 저 무거운 캐리어를 들고 날라야 하나 걱정되었는데 집 앞에서 20분이나 기다리게 만든 관리인이 2층이란다. 그나마 다행이다 했는데 집이 층고가 높아 말만 2층이지, 우리 아파트 기준으로는 4층이다. 애고 힘들다.
짐을 풀고, 집주인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인근 마트에서 사온 돼지고기를 굽고, 집에서 가져온 쌀로 밥도 하고 해서 11시나 되어서 저녁을 먹는다. 소주도 개봉했다.
집도 괜찮고 유명 관광지와 술집 음식점도 가까워서 좋은데 생활하기에는 좀 불편한 점이 많아 내가 많이 힘들게 생겼다. 내가 각종 필요 물품들을 들고 오르내리는 동안 마눌님은 옆방에 지내는 이스라엘 친구와 안면도 튼다. 재밌다.
상뜨 뻬떼르부르그는 도로상 거리로 카잔에서 1,400km 정도 떨어진 곳인데도 시간이 바뀌지 않는다. 오는 내내 제발 1시간 늘어나라 고대했는데, 아니다. 그래서 산길샘의 일몰시간은 9시 10분 정도이지만 도착한 이후에도 한동안 날이 밝다. 저녁을 먹으며 하늘을 보니 여전히 환하다. 이제 며칠 더 지나 더 북쪽으로 가게 되면 백야를 보겠지. 백야가 처음에는 신기하겠지만 갈수록 불편하겠지?
'해외여행 > 유라시아 횡단' 카테고리의 다른 글
D+24 상뜨 뻬떼르부르그 2일차 (0) | 2018.11.06 |
---|---|
D+23 상뜨 뻬떼르부르그 1일차, 기아서비스와 여름궁전 (0) | 2018.11.06 |
D+21 모스크바 관광 2일차 (0) | 2018.11.06 |
D+20 모스크바 관광 1일차 (0) | 2018.11.06 |
D+19 야로슬라블 - 모스크바 270km. 예정대로 모스크바 입성, 10,005km (0) | 2018.11.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