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을 좀 많이 잤으면 했는데 역시 4시에 눈을 뜨고는 그대로다. 할수없지. 밖에 나가니 서늘한데 안개가 자욱하다.
떡국을 끓여본다. 친구가 그동안 소원하던 떡국인데 달리 재료가 없으니 그냥 다시다 국이네. 달걀을 하나 푸니 좀 낫긴 하다. 오늘은 거리도 짧고 해서 좀 느긋하게 준비하니 출발은 8시 40분이다. 오늘은 내가 주로 운전할 거라고 하니 좀 서운한 눈치지만 어쩔 수 없다. 나도 내 운전 컨디션을 회복해야 남은 4천km를 갈 수 있으니... 그런데 출발 후 30분 정도에 잠이 오기 시작하네. 길이 좋아서 잠이 더 빨리 오는 건가? 새벽에 일찍 일어나고 정신력으로 버텨본다 했는데 안 되네. 핸들을 넘기고 잠에 빠져든다.
시간이 충분히 지나기도 했고 길이 너무 울퉁불퉁하니 시끄러워서 잠을 깨보니 툴룬을 지난다. 지난 번에 분명히 이 동네를 지났을 텐데 전혀 기억에 없네. 오늘은 자다가 깨서 더 그런가? 버스터미널 같은 게 보여서 세우고 잠시 구경이나 할까 했는데 지나쳐 버려서 좀 아깝다. 마을 길은 엉망인데 시내를 벗어나니 길은 다시 좋아진다. 러시아가 대체로 그렇다.
마을을 하나 더 지나고 고갯마루에서 핸들을 넘겨받는다. 고도가 높아지면서 그냥 밋밋하기만 한 풍광이 아니라 산도 물도 보여서 마냥 심심하지만은 않다. 그렇다고 해서 특별한 경치가 있다는 건 아니고 나무에 막히거나 벌판만 보이는 지루함에서 좀 벗어날 수 있다는 정도다. 운전하기에는 좀 낫다. 갈 때와는 느낌이 많이 다른 건 정상적인 거다. 원래 같은 길이라도 오갈 때의 경치는 같은 경치가 아니지. 그래도 그때 너무 바쁘게 지나치기만 한 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이제사 남는다.
담배 한 대 피우려고 길 옆으로 잠시 빠졌는데 지나가던 러시아 녀석이 하나 신기한 듯 차를 세우고 묻는다. 역시 남이냐 북이냐가 먼저인데, 이제 돌아가는 길이라니 역시 미친 인간이라는 제스처다. 하긴 그렇다. 수만 km를 달리는 게 어디 보통 정신으로 할 짓이냐.
길가 카페에서 빵과 커피로 점심을 때운다. 거의 튀기다시피 한 빵 속에 고기를 넣었는데 빵은 졸깃하니 맛있지만 속에 든 고기는 참 맛없다. 이런 걸 먹고 사는 사람들이 점점 불쌍해진다. 여기 남자들은 늙으면 거의 머리가 벗겨지고 배만 나온다. 물론 배가 나오지 않은 노인이 없는 건 아니지. 사람들이, 특히 여자들은 처녀 때와 달리 나이들면서 대체로 뚱뚱하다.
이르쿠츠크가 가까워질수록 고도는 더욱 높아져 최고 607도 찍는다. 갈 때는 왜 이런 게 생각나지 않는지 참 신통하네. 마음이 급해서 그랬을까? 고도가 높으면 보이는 게 다르지. 고도가 이 정도면 관악산 수준이지만 산이라고 해도 구릉이니 높다고 다 산이라고 할 수는 없지.
교통량이 그리 많아보이지 않는데도 곳곳에서 도로확장 공사를 해서 길이 많이 막히네. 시내로 들어와 숙소로 가기 전에 혹시 대형 마트가 있나 열심히 찾는다. 마침 매우 큰 상가가 모인 곳이 있어 들어가보니 전자제품 또는 유아용품 등의 전문상가가 대형매장으로 운영되고 있는데 내가 찾는 식품 마트는 없다. 도대체 그 마트들은 다 어디에 있는 거냐? 옆 은행에서 5천 루블을 인출해서 숙박비를 대비한다. 운영자 놈이 내 메시지에 답변을 하지 않는다.
숙소를 잘 찾았는데 열쇠가진 인간이 늦게 온다. 운영하는 놈도 불친절하기 짝이 없다. 기다리는 동안 동네 마트를 찾아 냉동 오겹살, 냉동 새우, 보드카 등 저녁거리를 준비한다. 숙소는 4층 아파트. 동네가 전부 새로 지은 아파트단지라 깔끔하기는 하다. 방도 좋은데 소파가 없어 안락하게 쉬기는 다 글렀다. 방을 확인하고 다시 마트에 가서 고등어도 사본다.
오겹살을 잘 녹여 잘라보니 비계가 너무 두껍다. 구워먹기를 포기하고 김치찌개로 만든다. 비계를 좋아하는 나도 이 두꺼운 비계가 지겨워서 내일은 비계를 좀 잘라내고 굽든지 해야겠다. 냉동 새우가 매우 비싸네. 가격표가 없어서 그냥 집어들었는데 나중에 확인하니 그 작아서 먹기도 불편한 새우 500g에 600루블이나 한다. 깐새우 500g은 생새우 1.7kg라고 표시해뒀네. 지놈들도 비싸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밥먹고 나니 10시 반이다. 일찍 자면 또 새벽에 잠이 깰 테지만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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